나카가와 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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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카가와 이치로는 1925년 홋카이도에서 태어난 일본의 정치인이다. 규슈 대학 농학부를 졸업하고 홋카이도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오노 반보쿠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1963년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된 후, 자유민주당 내에서 보수 강경파로 활동하며 농림수산대신, 과학기술청 장관 등을 역임했다. 1982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이듬해 삿포로의 호텔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에는 타살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으며, 국수주의적 성향과 사생활 논란으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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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가와 이치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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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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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이름 | (나카가와 이치로) |
출생일 | 1925년 3월 9일 |
출생지 | 일본 제국 홋카이도 히로오군 히로오정 |
사망일 | 1983년 1월 9일 |
사망지 |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시 주오구 |
정당 | 자유민주당 (오노파 → 후나다파 → 미즈타파 → 나카가와파) |
학력 | 규슈 제국대학 농학부 |
이전 직업 | 홋카이도 개발청 관리, 중의원 의원 비서 |
칭호 | 정3위 |
훈장 | 훈1등 욱일대수장 |
가족 (정치가) | 아버지: 나카가와 분조 (전 히로오정 의회 의원) 동생: 나카가와 마사오 (전 히로오정 의회 의원) 동생: 나카가와 요시오 (전 참의원 의원) 장남: 나카가와 쇼이치 (전 중의원 의원) |
배우자 | 나카가와 사다코 (아내) |
자녀 | 나카가와 쇼이치 |
관직 | |
제35대 과학기술청 장관 | 내각: 스즈키 젠코 내각, 스즈키 젠코 개조 내각 임기 시작: 1980년 7월 17일 임기 종료: 1982년 11월 27일 |
초대 농림수산대신 | 내각: 후쿠다 다케오 개조 내각 임기 시작: 1978년 7월 5일 임기 종료: 1978년 12월 7일 |
제49대 농림대신 | 내각: 후쿠다 다케오 개조 내각 임기 시작: 1977년 11월 28일 임기 종료: 1978년 7월 5일 |
중의원 의원 | 선거구: 구 홋카이도 5구 당선 횟수: 7회 임기 시작: 1963년 11월 22일 임기 종료: 1983년 1월 9일 |
2. 생애
홋카이도 출신의 일본 정치인이다. 규슈 대학 농학부를 졸업한 후 홋카이도청과 홋카이도 개발청에서 관료로 근무했다. 오노 반보쿠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의 비서관으로 발탁된 것을 계기로 정계에 입문했으며, 1963년 총선에서 자유민주당 후보로 중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
자민당 내에서 와타나베 미치오, 이시하라 신타로 등과 함께 강경 보수 성향의 정책 그룹인 청람회를 결성하고 리더 역할을 맡으며 매파 정치인으로 이름을 알렸다. 후쿠다 다케오 내각에서 농림수산대신으로, 스즈키 젠코 내각에서 과학기술청 장관으로 임명되어 각료를 역임했다. 198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으나 나카소네 야스히로에게 큰 표 차이로 패배하며 최하위에 머물렀다.
1983년 1월 9일, 삿포로의 한 호텔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으며, 이후 사인은 자살로 정정 발표되었다.[2] 향년 57세였다.
2. 1.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1925년 3월 9일, 홋카이도 히로오군 모요리촌(현재의 도카치 종합진흥국 히로오군 히로오정)에서 태어났다. 나카가와 집안은 할아버지 대에 도야마현에서 홋카이도로 이주한 개척 농가였다. 아버지는 14세 때부터 도토 지역의 개척에 종사했다. 나카가와는 10명의 형제자매 중 장남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태어나자마자 이로리 불에 타 숨진 형 류타로와 요절한 누나 미요가 있었다. 이후 누나 둘이 더 태어난 뒤 태어났기에 사실상 장남 대우를 받으며 자랐다.나카가와가 초등학교 2학년일 때 아버지는 개척 사업을 그만두고 잡화상 겸 가축상으로 전업했다. 학창 시절 그는 수학과 산수에 뛰어났으며, 학교 공부를 마친 뒤에는 부모님의 일을 도왔다. 어릴 때부터 노동을 하여 다부진 체격을 갖게 되었다.
우쓰노미야 고등농림학교(현재의 우쓰노미야 대학 농학부)를 거쳐, 1947년 9월 규슈 제국대학(현재의 규슈 대학) 농학부 농업토목과를 졸업했다.[4] 졸업 후 농림성 관료가 되기를 희망했으나, 도쿄에서의 생활비 부담 때문에 홋카이도청에 취직했다. 이는 히로오정 의원이 된 아버지가 홋카이도청에 진정서를 제출했을 때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너는 관리가 되어라"라고 말한 영향도 있었다.
2. 2. 관료 시절
규슈 제국대학 농학부 농업토목과를 1947년 9월 졸업했다.[4] 본래 농림성 관리가 되기를 희망했으나, 도쿄에서의 생활을 우려하여 자원해서 홋카이도청에 들어갔다. 이는 홋카이도청에 진정을 하러 갔다가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던 아버지 나카가와 분조가 "너는 관리가 되어라"라고 말한 영향도 있었다.나카가와가 홋카이도청에서 근무를 시작할 당시 홋카이도는 일본사회당의 영향력이 강했으며, 지사는 혁신계의 다나카 도시부미였다. 나카가와는 대학 교수의 소개장을 들고 대학 선배이기도 한 다나카를 찾아갔지만, 면담이 쉽지 않자 소개장을 태워 버렸다고 한다.
1951년 홋카이도 개발청이 설치되자 개발담당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1953년 오노 반보쿠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의 비서관으로 발탁되었다. 나카가와는 오노의 취임 연설 도중 졸다가 발탁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오노 장관은 7개월간 재임한 뒤 자유민주당 총무회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후임으로는 오가타 다케토라가 부총리 겸 장관으로 취임했다. 나카가와는 오가타 장관 밑에서도 비서관으로 계속 근무했다. 5개월 뒤인 1954년 12월, 제5차 요시다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오가타 장관의 임기도 끝나자 나카가와는 개발전문관으로 이동했다.
2. 3. 정치 입문과 활동
1959년 오노 반보쿠의 권유로 12년간의 관료 생활을 마치고 그의 비서가 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아버지 나카가와 분조는 아들이 안정적인 직업을 버리고 정치인의 비서가 되는 것을 크게 반대했지만, 나카가와는 오노에 대한 호의를 바탕으로 정계 진출을 결심했다. 아버지는 "이런 바보 같은 아들이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래,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하고 포기할 테니 네 마음대로 해라"라며 집에서 쫓아냈다고 전해진다.1963년 총선에서 오노의 권유로 자유민주당 후보로서 홋카이도 제5구에 출마하여 처음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그의 초대 후원회장은 아이누 민족 운동가로 활동하던 마쿠베쓰정의 요시다 기쿠타로였다.
자민당 내에서는 초기에 오노파에 속했으나, 1964년 오노가 사망한 후 파벌이 분열되자 후나다파에 합류했고, 이후 미즈타파를 거쳤다. 또한 후쿠다 다케오가 재무대신으로 재직할 때 두 차례 대장성 정무차관으로 그를 보좌하며 가까운 관계를 형성했다. 제3차 사토 내각과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제1차 개조)에서도 대장정무차관을 역임했다.
1973년에는 와타나베 미치오, 이시하라 신타로, 하마다 코이치 등 동료 소장파 의원들과 함께 당내 파벌을 초월한 강경 보수 성향의 정책 그룹인 청람회를 결성하고 리더 역할을 맡았다. 청람회는 회원들이 혈서를 썼다는 일화로 인해 강경한 이미지를 얻었으며, 이를 계기로 나카가와는 젊은 매파 정치인으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후쿠다 다케오와 정치적 행보를 같이하게 된다.

1977년, 보수 활동을 통해 친분을 쌓은 작곡가 마유즈미 도시로가 창설한 자민당 당우 조직 자유국민회의의 초대 대표직을 수락했다. 같은 해 11월 후쿠다 다케오 개조 내각이 출범하자 농림수산대신으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각료가 되었다. (1978년 7월 성청 개편으로 농림대신에서 농림수산대신으로 직함 변경)
1978년 10월 6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민사당의 오우치 게이고 의원이 통합막료회의 의장 구리스 히로오미 해임의 원인이 된 초법규적 발언에 대한 견해를 묻자, 나카가와는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논의에 충분히 귀 기울여야 한다"고 답변하여 개헌론자로서의 입장을 드러냈다.[17] 같은 해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후쿠다가 오히라 마사요시에게 패배하자, 내각 총사직을 결정한 후쿠다에 반발하며 "예비선거는 부정이다"라고 주장, 마지막 각의에서 총사직서 서명을 완강하게 거부하기도 했다.[18][5] 이는 단순한 제스처를 넘어 오히라 정권의 출범을 저지하려는 시도로 해석되기도 했다.
1979년에는 이시하라 신타로, 하세가와 시로, 마쓰자와 유조, 하세가와 다카시 등과 함께 자유 혁신 동우회를 결성하여 사실상의 파벌(나카가와파) 영수가 되었다.
1980년 7월 출범한 스즈키 젠코 내각에서는 과학기술청 장관 겸 원자력위원장으로 임명되어 2년 4개월간 재임했다.
198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모토 도시오, 아베 신타로 등과 함께 출마했다. 당시 입후보에 필요한 국회의원 추천인 50명을 채우기 위해 후쿠다파로부터 명의를 빌려야 할 정도로 세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선거 결과, 나카소네가 전체 당원·당우 투표의 60%에 가까운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고, 나카가와는 최하위에 머물렀다.
2. 4. 사망
1983년 1월 9일, 삿포로 파크 호텔 10층 1022호실 욕실에서[19][6] 아내 사다코가 사망한 나카가와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사인이 급성 심근 경색으로 발표되었으나, 이틀 뒤 목을 매 숨진 자살로 정정되었다.[2] 향년 57세였다.사망 원인은 처음에는 심장마비로 보도되었는데, 이는 나카가와의 친구이자 국회의원 동료인 다카기 마사아키가 가족의 요청에 따라 의사에게 진실을 은폐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라고 후에 인정했다.[3] 나카가와의 자살 직후, 고치현에 있던 고토다 마사하루 관방장관은 홋카이도 경찰과 옛 직장인 경찰청을 통해 자살 소식을 전달받았다. 고토다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에게 전화로 사실을 알린 뒤, 기자단에게는 나카가와의 급사를 발표했지만 유족과 측근을 고려해 사인은 공개하지 않았다.[7]
나카가와는 총재 선거가 끝난 뒤부터 불면증을 강하게 호소했으며 수면제도 복용하고 있었다. 그는 유서를 남기지 않았고, 자살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 소문이 돌았다.[3]
사망 당일, 도칸나이 나오히로 홋카이도 지사가 현장을 찾았으며, 나카가와의 유해는 비행기를 통해 도쿄도에 있는 자택으로 옮겨졌다.[20][8] 중의원에서는 야스이 요시노리가 추도 연설을 했으며,[21][9] 묘소는 도쿄도 시부야구의 다이초지(貞昌寺)에 있다.
3. 정치적 성향 및 논란
1973년 와타나베 미치오, 이시하라 신타로 등과 함께 자민당 내 우파 성향의 정책 그룹인 청람회를 결성하며 젊은 매파 정치인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후쿠다 다케오와 정치적 행보를 같이하며 그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1977년에는 자민당의 당원 조직인 자유 국민 회의가 창설되자 초대 대표를 맡았으며, 같은 해 후쿠다 다케오 내각 (개조)에서 농림상으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각료가 되었다. 1978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후쿠다 다케오가 오히라 마사요시에게 패배하자, 나카가와는 "예비선거는 부정이다"라고 주장하며 내각 총사퇴 각의 서명을 완강히 거부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18][5] 이는 단순한 반발을 넘어 오히라 정권의 출범을 저지하려는 시도로 해석되기도 했다.
1979년에는 이시하라 신타로 등과 함께 자유 혁신 동우회(사실상의 나카가와파)를 결성하여 독자적인 정치 세력화를 모색했다. 1980년 7월 출범한 스즈키 젠코 내각에서는 과학기술청 장관 겸 원자력위원장으로 임명되어 2년 4개월간 재임했다.
198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모토 도시오, 아베 신타로 등과 함께 입후보했다. 당시 총재 선거 출마에는 국회의원 50명의 추천이 필요했는데, 나카가와는 자신의 파벌 세력만으로는 이를 충족하지 못해 후쿠다파로부터 명의를 빌려 겨우 출마 요건을 갖추었다. 선거 결과,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었고 나카가와는 최하위에 머물렀다.
3. 1. 국수주의 및 반공주의
나카가와는 자타가 공인하는 열렬한 국수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였다. 1978년 10월 6일, 농림수산대신 시절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민사당의 오우치 게이고 의원이 통합막료회의 의장 구리스 히로오미의 초법규적 발언[10]에 대한 견해를 묻자, 나카가와는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다는 것도 충분히 귀 기울여야 한다"고 답변하여 개헌에 대한 입장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17][10]그러나 미국 CIA는 나카가와가 겉으로는 반공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친소련 정권 수립을 계획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11] 이로 인해 1983년 1월 총리 대리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려 했을 때, 미국 정부로부터 페르소나 논 그라타(기피 인물)에 해당한다며 입국을 거부당했다.[22][11] 이 사건은 나카가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관련된 의혹의 한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3. 2. 자살 논란과 타살 의혹
1983년 1월 9일 삿포로 파크 호텔 10층 1022호실 욕실에서[19][6] 나카가와가 숨진 채 발견되었으며, 발견자는 부인 사다코였다. 처음에는 사인이 급성 심근 경색으로 발표되었으나[2], 이틀 뒤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정정되었다.[2][7] 향년 57세였다. 사망 당일 유해는 항공편으로 도쿄 자택으로 옮겨졌다.[20][8] 나카가와는 총재 선거 패배 후 불면증을 호소하며 수면제를 복용하고 있었다.[19]공식적으로 나카가와의 죽음은 자살로 결론 내려졌지만, 유서가 발견되지 않아[3] 자살 동기에 대한 여러 의문점이 남게 되었다.[12] 일반적으로는 그가 자민당 내 뉴리더 중 한 명으로 부상하며 소규모 파벌(자유 혁신 동우회)의 대표로서 총재 후보까지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관계나 정치 자금 문제로 상당한 부담을 안게 되었고,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자살에 이르렀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23][12]
그러나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다. 나카가와의 비서 출신 참의원 다카기 마사아키가 '고인의 명예를 위해 빨리 화장하라'는 나카가와의 지시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사망 이틀 만에 서둘러 화장을 진행한 점,[23] 유서가 없음에도 정치인의 장례를 이례적으로 신속히 치른 점, 사인을 심근 경색에서 자살로 번복한 점[2] 등이 의혹을 증폭시켰다. 다카기 마사아키는 후에 가족의 요청으로 의사에게 사인을 숨겨달라고 부탁했음을 인정했다.[3] 고토다 마사하루 당시 관방장관도 홋카이도 경찰 등을 통해 자살 사실을 조기에 파악했으나, 유족과 측근을 배려해 사인을 공개하지 않았다.[7]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타살설까지 제기되었지만, 당시 제1비서였던 스즈키 무네오를 비롯한 관계자들은 타살설을 일축했다.[23] 나카가와의 죽음을 둘러싸고는 여러 소문이 난무했다. 소련의 KGB 공작원 스타니슬라프 레프첸코로부터 거액의 정치 자금을 받은 사실이 나카소네 야스히로 측에 발각되어 협박을 받았다는 설, 총재 선거 자금으로 인한 막대한 빚 문제 설, KGB에 의한 암살설, 간암 투병설 등이 대표적이었다.[23] 이시하라 신타로는 자신의 저서에서 나카가와의 죽음이 '스스로의 소행으로 인해 살해된 것 같다'고 언급하며 타살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2010년 10월, 스즈키 무네오는 나카가와가 1975년 전일본공수(ANA) 간부로부터 100만엔을 받았으며, 이 사실이 록히드 사건 수사 중 드러나 1982년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에게 추궁당한 것이 자살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카가와의 부인 사다코는 스즈키의 주장을 부인했다.[24][13]
또한 나카가와 사망 5일 후, 모스크바로 발송된 KGB 암호 전문에는 '나카가와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사주를 받은 자에게 살해당했다', '스즈키 무네오는 CIA와 결탁하여 나카가와를 뇌물 수수 혐의로 몰아넣었다'는 내용이 TV 아사히 전무이자 소련 스파이였던 미우라 기네지의 발언으로 기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25][14] 한편, 나카가와가 겉으로는 반공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친소련적 행보를 보인다는 이유로 미국 방문 시 CIA로부터 입국 거부 통보를 받았다는 점[11] 역시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의 배경 중 하나로 거론된다.
3. 3. 사생활 논란
일반적으로 "밝은 나카가와 이치로와 무서운 나카가와 이치로, 두 사람이 있다"라고 평가받았다. 그의 전 비서였던 스즈키 무네오는 호쾌함과 섬세함이 공존하는 인물이었다고 회고했다.나카가와는 술과 싸움에 강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어느 시점부터 과도한 음주가 그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의 술친구였던 타마키 카즈로는 나카가와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카가와 이치로의 술 마시는 모습은 원래 밝고 쾌활 그 자체였다. 취하면 말이지, 가지고 있는 지갑을 게이샤들에게 휙 던져 버린다. 원하는 만큼 가져가라는 거다. 그래서 게이샤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원래 돈에 별로 집착하지 않았다. 그게 동우회를 만들 무렵부터일까, 취하면 전후 분간을 못 하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푸념 섞인 술꾼이 되었다. 언젠가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취해서 말이지, 오줌을 누러 가는데, 어디가 화장실인지 몰라서, 문 앞에서 방뇨하려 하는 거야. 허둥지둥 화장실까지 데려가서 무사히 일을 치렀지만, 그런 일, 옛날에는 없었지."
1982년 총재 선거 이후에는 기행이 더욱 두드러졌다고 알려져 있다. 국회의사당 부지 내에서 노상방뇨하는 모습이 사진 주간지에 실리기도 했다. 이마이 히사오에 따르면, 나카가와는 술에 취하면 화장실에 가지 않고 때로는 2층 창문에서 길가로, 때로는 방구석 재떨이에 소변을 본 뒤 태연하게 잠들었다고 한다.
나카가와 부부의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1년 7월 9일, 삿포로시 주오구의 야히코 신사에서 사다코와 결혼식을 올렸으나, 결혼을 반대했던 아버지 문조는 참석하지 않았다. 정계에서도 부부 불화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나카가와의 정치적 조언자였던 가네마루 신은 나카가와가 아내를 두려워하며 불평하자 "그런 부인은 실컷 때려주세요. 그러면 남편 말을 잘 듣게 될 거예요. 걱정 마세요"라고 조언했다고 말했다. 가네마루는 총재 선거 이후 나카가와의 상태가 나빠진 것에 대해, 아내가 수면제를 과다 복용시킨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며 "무지해서 먹였다면 용서할 수 있지만, 알고서 먹였다면, 이건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15]"라고 언급했다.
아내 사다코는 나카가와 가문의 혈통뿐 아니라, 이치로의 '농부 출신'다운 소박한 외모와 생활 방식 자체를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반면 나카가와 본인은 개척 농가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정치 활동에서도 서민적인 면모를 강조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두 사람은 취향, 인간관계, 삶의 방식 등 모든 면에서 상반된 부부였다.
장남 쇼이치가 구순구개열로 수술을 받을 당시, 사다코는 "이건 당신들 나카가와 형제의 피에 문제가 있는 것이니, 당신들끼리 지불하세요"라며 수술비 부담을 거부했고, 결국 나카가와의 본가에서 비용을 지불하게 했다. 이 일로 나카가와는 아내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형제들에게 "미안하다. 참아줘"라며 머리를 숙여 사과해야 했다.
4. 가족 관계
나카가와 가는 할아버지 고하치로 대에 도야마현 니시토나미군 후쿠미츠 정(현 난토시)에서 홋카이도 히로오 군 히로오 정으로 이주한 농민의 후손이다. 나중에 도쿄도로 이주했다.
관계 | 이름 | 설명 |
---|---|---|
아버지 | 분조 | 농업, 잡화상 겸 가축상, 히로오정의회 의원. 1978년 사망. |
어머니 | 세이 | 야마가타현 출신. |
형 | 류타로 | 요절. |
누나/여동생 | - | 총 5명 (장녀 미요는 요절). |
본인 | 나카가와 이치로 | 실제로는 셋째 아들이나 장남으로 취급받음. |
남동생 | 마사오 | 잡화상, 히로오정의회 의원. |
남동생 | 겐조 | 창고업. |
남동생 | 요시오 | 홋카이도청 공무원, 홋카이도의회 의원 (5선), 참의원 의원 (2선). |
아내 | 사다코 (기노시타) | 국철 직원의 딸. 1930년 출생, 2021년 10월 17일 사망. 이치로와 1951년 결혼했으나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15] |
장남 | 쇼이치 | 은행원, 중의원 의원 (8선). 아버지의 지역구를 물려받음.[2] 1953년 7월 출생, 2009년 10월 사망. 구순구개열이 있었다. |
차남 | - | 이름 미상. |
이치로는 부모 슬하 10남매 중 장남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장남 류타로와 장녀 미요가 요절하여 누나 두 명 다음으로 태어난 이치로가 장남 취급을 받았다.
1951년 7월 9일 사다코와 삿포로시 주오구의 야히코 신사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나, 아버지 분조는 결혼에 반대하여 참석하지 않았다. 부부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으며, 이는 정계에서도 알려진 사실이었다.[15] 사다코는 나카가와 일족과 그의 농민 출신 배경 등을 싫어한 반면, 나카가와는 자신의 출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정치가가 된 후 서민성을 내세우는 등, 여러 면에서 상반된 부부였다.
장남 쇼이치는 구순구개열 장애가 있어 유아기와 대학 졸업 후 수술을 받았다. 첫 수술 당시 사다코는 수술비를 나카가와 가문의 유전 문제로 치부하며 시동생인 마사오에게 지불하게 했고, 이에 나카가와는 마음 아파하며 형제들에게 사과했다고 전해진다.
5. 역대 선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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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선거 종류 | 회차 | 직책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결과 | 선거 제도 |
---|---|---|---|---|---|---|---|---|---|---|
1963년 | 총선거 | 30회 | 중의원 의원 | 홋카이도 제5구 | 자유민주당 | 68,231표 | 14.6%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67년 | 총선거 | 31회 | 중의원 의원 | 홋카이도 제5구 (중선거구) | 자유민주당 | 90,733표 | 18.0%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69년 | 총선거 | 32회 | 중의원 의원 | 홋카이도 제5구 (중선거구) | 자유민주당 | 90,074표 | 16.6%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72년 | 총선거 | 33회 | 중의원 의원 | 홋카이도 제5구 (중선거구) | 자유민주당 | 115,040표 | 20.3%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76년 | 총선거 | 34회 | 중의원 의원 | 홋카이도 제5구 (중선거구) | 자유민주당 | 103,965표 | 17.1%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79년 | 총선거 | 35회 | 중의원 의원 | 홋카이도 제5구 (중선거구) | 자유민주당 | 158,027표 | 26.37%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80년 | 총선거 | 36회 | 중의원 의원 | 홋카이도 제5구 (중선거구) | 자유민주당 | 145,801표 | 24.05%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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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hiro Nakagawa, 57, Is Dead; Ex-Cabinet Minister in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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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telegr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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